2016년 12월 3일 토요일

한 386 선배의 좌충우돌 (네번째)

제목 : 한 386 선배의 좌충우돌 (네번째)

부제목 : 매우 그럴듯한 과학적 시각으로 포장한 사이비 논리에 불과한 유물사관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 이미지
▲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 이미지


사랑하는 좌충 군과 우돌 군에게...

한 주간 잘들 지냈는가? 지난 시간에 이 세상을 지배하던 두 가지 사관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어. 오늘은 이들 두 가지 사관이 오늘날의 세상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여 보겠네.

자네들이 보기에 오늘날 세상의 주요 이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지. 공산주의가 멸망한 이후, 자본주의의 세상이 되나보다 하였어. 그러나 오늘날을 자본주의의 세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기가 쉽지 않아. 그 이유는, 서구식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완벽한 해결책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로 인하여, 수정된 사회주의화의 망령들이 휩쓸고 지나간 나라들도 많이 있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완벽한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하나의 근본 이유는 역시 소득 재분배의 문제야.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면,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마련인데, 이들 사이에는 명확한 불평등이 존재하게 돼. 불평등은 곧 불행을 낳고, 불행은 불만을 낳으며, 불만 속에 사회 갈등이 발생하게 돼. 따라서 사회 갈등을 획책하는 세력들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골을 주목하게 되지.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만한 곳에 도사리고 서게 되는 거야. 사람들이 느끼는 심적 박탈감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제도적 모순 때문으로 몰고 가는 거야. 그러면서 이미 파기되어 버린 사회주의화의 악령들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나오게 되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해결책이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은 뚜렷한 방향성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어. 사회주의적 정책을 적절히 혼합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시장의 경제효과를 절감시키는 결과를 내게 되어 전체 파이의 크기를 줄이고, 오히려 퇴행하는 경우가 많지. 그렇다고, 순혈 자본주의 정책만으로 가게 되면, 불평등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게 돼.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자본주의는 경제문제를 풀기 위한 경제 사상일 뿐, 세상에 대한 철학적 이해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야. 반면, 공산주의는 (사실이든 아니든) 세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는 명분을 잡고 있어. 자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는 많은 사람들은 더 뿌리가 깊어 보이는 공산주의적 생각으로 넘어가게 돼. 우리 주변에 소위 “똑똑한(혹은 똑똑해 보이는) 좌파”들이 많은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야.

자본주의의 명맥을 잇고 있는 서구 유럽과 미국에서는 공산주의 철학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어떠한 응답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 “너희들은 틀려먹었어.”라는 말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세상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라는 비젼과 자신감에 찬 한 마디를 던질 수 있을까? 여러모로 보았을 때, 현재의 자본주의 이론 체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야.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세상을 보는 관점”까지는 제시를 못하고 있거든. 공산주의의 허상을 제대로 무너뜨리려면, 그들이 제시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제대로 논박할 수 있는 논리체계가 필요해.

대다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표방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논할 때, 기독교적 신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 자본주의의 출범은 사실 기독교적 신앙 전통을 가진 국가들에서 이루어졌지. 자본주의는 뿌리 철학을 가진 공산주의와는 달리 단순 경제 사상이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을 부인할 필요가 없었어. 결국 공산주의의 뿌리 관점을 논박하기 위하여서는, 다수 자본주의 국가들의 뿌리 신앙인 기독교 사관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지.

그런데 말이야. 불행하게도, 현재의 기독교 신앙으로 공산주의적 문제 제기(공산주의는 무너졌어도, 그들이 남긴 문제 제기는 아직 유효하거든.)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아. 전편에도 이야기하였듯이, 기독교 신앙에는 비합리적인 면이 많아서, 오늘날 과학 중심의 세상을 선도하기에는 무리가 많아. 기독교인들 중에 리처드 도킨스의 논변을 제대로 공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스마트폰과 같은 현대 과학 문명의 이기를 기독교인들도 누려야 하는 상황에서, 신 중심의 비이성적 교리를 남들에게 강요하기는 점차 힘들어지겠지?

거기다가 최근 한국 기독교를 보면, 신도들에게 돈과 복종을 강요하고, 정작 목회자 자신들은 지옥에 떨어질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들도 종종 보이지. (물론 모든 목회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야. 신실하고 좋으신 분들도 많아.) 이러한 한국 기독교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를 아직도 엄존하고 있는 북한의 공산 독재 체제로부터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을까.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한 많은 보수 세력들이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을 그들로부터 기대하기는 쉽지 않지.

결국,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섭리사관에는 한계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야. 마르크스나 레닌이나 모두 기독교 국가인 독일과 러시아 사람들이었거든. 기독교 국가에서 마르크스 사상이 등장하고 팽창한 이유는 결국 그 당시에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적중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점들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무척 불안하였지. 기독교의 아가페적 사랑으로는 그 모순점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어.

기독교의 섭리사관은 비논리적인 신비적 교리를 포함하고 있어서 사회문제를 해결할 제대로 된 역사 법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지. 이러한 교리를 근대 사회과학이 받아들일 수 없었어. 기독교 나름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방면으로 진행하였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였지.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사관을 제압할 수 있는 교리체계가 없었어. 이에, 유물사관은 신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사관을 미개한 미신 혹은 신화라고 공격하였지. 공산주의가 멸망하였다고 하여 섭리사관이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공산주의 초기에서부터 기독교 섭리사관은 유물사관과의 논리적 논쟁에서 게임이 안 되었었거든.

이에 비하여 유물사관을 한번 살펴보자. 유물사관이 등장한 것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야. 자본주의의 모순점들이 많이 보였고, 특히 재산가 계급과 노동 계급 사이의 갈등은 그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었어. 당시 사회의 허점을 정확히 짚어내었고, 이에 대한 실천적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것이 공산주의 사상의 매력이었지. 오늘날에도 중남미 등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잔존하는 이유는 후진국가에서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마르크스 시대의 그것과 비슷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야.

이렇게, 유물사관은 겉보기에는 무척 “똑똑해” 보여. 스스로를 법칙성을 가진 과학적 역사관이라고 자랑하고 있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실제로는 자신들의 폭력혁명에의 논리를 매우 그럴듯한 과학적 시각으로 포장한 사이비 논리에 지나지 않아. 이는 이미 공산주의의 멸망에서 증명되었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과 혁명이 필연적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자연계의 발전법칙을 왜곡 또는 은폐하였지. 자연계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은 그 방법이 판이함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이념과 언어 책략으로 양자를 일치시켜 대중을 오도하였어. 그들의 교묘한 논리에 대한 소개와 그것을 논파하는 방식에 대하여서는 앞으로의 편지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설명할 거야.

자,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20세기를 좌우하던 두 개의 큰 사상의 조류가 한계에 부딪힌 상태에서, 적당히 양자를 조합하여 미래를 꾸려나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좌충 군, 자네도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네만, 우리 사회에서 북유럽 모델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네. 하지만, 북유럽 모델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워낙에 자본주의 경제 전통이 오래된 곳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북유럽 모델이라고 해 봐야, 사실 좌우의 양 날개를 적당히 조합한 모델이야. 영속적인 모델이라 보기 힘들어. 지난 편지에서 이야기했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좌우 양 날개의 적당한 조합이 아니라, 좌우를 강력하게 통제하여 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두뇌와 척추, 다시 말하여, 목적성과 방향성의 제시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 새로운 모델이 어디에선가 뚝 떨어지기를 우리는 다시금 오매불망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
 

삼국유사 (출처 : 위키피디아)
▲ 삼국유사 (출처 : 위키피디아)


나는 현명한 내 아내와 지난 십 수 년 간 이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어 왔어. 아내는 북한에서 이미 주체사상화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상이라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변화시키는지를 체험한 사람이야. 그의 말에 의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 체험한 논리적 치밀성과 행동력에 비하여, 현재 남한의 자본주의와 소위 민주주의적 가치관 교육은 상당히 한심하여 보인다는 것이야. 북한은 비록 잘못된 체제이기는 하지만, 전국가가 김정은이 한 사람의 말과 행동에 의하여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데 비하여, 남한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대통령이 한 마디 하면, 수백 수천 가지 의견이 튀어나오고, 대통령을 욕하고 비하하는 일은 부지기수이지. 이런 현상을 “자유민주주의니까 괜찮다”, “원래 그래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유가 이미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는 증거가 있어. 수십 년 간 북한의 자유를 제한하여 온 김일성에 대한 만세 찬양을 광화문에서 하는 행위에도 자유를 부가하여야 한다는 말을 수도 서울의 시장이라는 분이 서슴지 않고 했지. 이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이런 생각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를 허용하게 된다면, 히틀러/김일성과 같은 인물이 또 나오게 되는 것이지. 물론 그 이전에 북한에 적화될 확률이 더 높겠지.

지금 우리는 머리와 척추를 잇는 중심축이 없는 상태에서 자유방임을 만끽하고 있어. 속칭 천민자본주의, 천민민주주의에 지배당하고 있지. 좌우 양 날개만 비대하게 큰 상태에서 머리와 척추의 존재는 점차 희미하여지고 있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내가 살아남기 위하여 남들을 어떻게 공략하여야 할까?’에 대한 고민만 남아있지. 멸망하는 방향을 정조준하여 가고 있다고 봐.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중심이 필요해. 중심을 갖춘 상태에서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는 것이야. 중심이 없이 자유와 평등을 남발한다면,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를 못 하게 돼. 그 말은 통일의 희망이 사라진다는 말이야. 현대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통일 없이는 한민족의 생존을 보장받기 힘들어. 우리 민족의 명운을 판가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와 같은 상황을 공동 인식한 상태에서, 내 아내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 아내는 탈북한 이후, 한국에서 한국사를 전공하였어. 북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한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이 사람이 탄복한 것이 하나 있어. 우리 민족의 건국 사상이 그것이야.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건국되었다고 나오고 있어. 홍익인간은 말 그대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야. 세상에 수없이 많은 나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지만, 모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건국하였지,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건국한 나라는 없어. 그것도 5천 년 전에 이러한 세계적 선진 사상이 출현한 것은 믿기 힘든 일이지. 노벨 문학상 수상자 게오르규는 홍익인간을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법률”이라고 하였어. 시라크 대통령은 “다른 나라는 어려울 때 성인이 나왔으나 한국은 아예 성인이 나라를 세우셨다”고 했지.

남북의 통일을 위하여 홍익인간 정신을 공통 비젼으로 삼자는 것이야. 그 의의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어. 첫째, 남북의 통일은 단순히 한민족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세계 평화의 초석이 됨을 외적인 명분으로 삼는 것이야. 둘째, 남한과 북한 사회에 잔존하는 수없이 많은 내적 갈등의 해결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어.

예를 들어, 재산가와 노동자의 갈등은 재산가가 노동자를 이롭게 하고, 노동자가 재산가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근본 정신을 공유한다면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야. 지역 갈등, 통일 이후 남북 간 소득 격차로 발생하는 갈등도 마찬가지의 정신을 공유한다면 해결 가능해.

물론, 다양한 반론이 있을 수 있어. 그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현실에서 그 논리가 안 통하는 것이 문제 아니냐는 것이지. 하지만 현재까지 국가 지도자가 “홍익인간”이라는 정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통일과 외교, 내치에 이르기까지의 근본 정신으로 삼고 정부를 조직한 경우가 있었을까? 아직 대한민국 헌법에는 “홍익인간”이라는 네 글자가 등장하고 있지 않지? (물론 교육법에는 “홍익인간” 글귀가 들어 있어. 하지만 역시 전면에 내세우기 힘든 사문화된 이념으로 나타날 뿐이야.) 그 이야기는 아직 현실에서 이러한 논리를 시도하여 본 일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이야. 무척 간단하고 당연한 듯 보이는 논리인데도 말이지.

소위 “민족”을 강조하는 북한에서는 단군릉 등을 조작하여 가면서까지 “홍익인간”을 정치적으로 써 먹으려고 해.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계통을 이은 우리 정부는 “홍익인간”에 대하여 지도이념으로서는 써먹을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지.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국내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민족정신을 중흥시킴으로써 중심을 잡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

좀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지면이 여기까지라서 아쉽네. 공산주의의 각론에 대한 격파는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고, 앞으로의 편지를 통하여 홍익인간 이념에 대한 설명도 구체화할 필요가 있어. 현재까지의 논변에 대하여 불만이나 논란거리가 있으리라 생각 들지만, 다음 편지들에서 구체적인 부분들을 더 논해 보도록 함세.

오늘도 졸필의 서간문을 읽어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그럼 다음 시간에 보자고...



2015년 7월 26일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확신하는 사팔육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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