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명예롭게 죽으라” 현대판 열녀문 세우겠다는 위안부 운동 단체 정대협
부제목 : ‘민족주의에 납치된 여성주의’, 2004년 한 여성학자의 정대협 비판 논문 재조명.
-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 등록 2016.09.28 14:57:30
※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측에 따르면, 현재 40명의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서 9명은 접촉을 하지 못했으나, 접촉한 31명 중에서 29명(78%)이 일본의 위로금을 수령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고 합니다(화해치유재단 "대부분 위안부 할머니 1억 받으면 한(恨) 푼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일본 측의 법적배상금이 아니면 절대 받을 수 없다는 소수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사만 전하면서 마치 위안부 할머니들 전체가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받아들이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차후 '낙인'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하지 못합니다([선우정 칼럼] 10억엔은 부끄러운 돈인가).
이에 미디어워치는 다시 문제는 정대협이라는 판단 하에 이미 2004년도에도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서 정대협을 비판했었던 한 여성학자의 논문을 리뷰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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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지난해 극적으로 타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전면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그 배경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현대판 열녀’가 될 것을 강요하는 정대협의 교조주의적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김정란 씨는 자신의 정대협 체험을 토대로 2004년에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주된 내용은 정대협이 여성 문제를 민족 문제로 치환 왜곡해 위안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학자이자 정대협에도 투신했던 김 박사의 정대협 비판이 특별한 이유는 같은 진보좌파 진영에서 나온‘내부비판’이자 ‘자기비판’이라는 점에서다. 정치적 목적이 배제된 순수한 지적, 도덕적 동기에서 발로한 여성학자의 진심어린 충언인 셈이다. 김 박사의 논문은 정대협 스스로 펴낸 증언록을 토대로 정대협의 모순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성을 높이고 있기도 하다.
김 박사의 논문이 나온 지 1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를 독점한 진보좌파 시민단체인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매커니즘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지난해 12월 28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첫‘정부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총리사과와 10억엔 기금을 약속했다. 그럼에도 현재 정대협과 정대협과 행동을 같이하는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은 법적배상만을 요구하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족의 명예를 내세워 할머니들의 일본측 아시아여성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수령을 반대했던 1997년의 정대협과 사실상 판박이다.
김정란 박사에 따르면 정대협은 전시 여성의 성 문제인 위안부 문제는 민족말살의 상징으로만 치환하려고 애를 썼다. 김 박사는 이런 차원에서 정대협이 조선인 위안부 모집과 운영방식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도 상당부분 왜곡하고 은폐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대협은 특히 ‘단결된 행동’을 위시해 위안부 할머니들 개개인의 의견을 철저히 억압하는 교조주의적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정대협은 90년대에는 일본측이 제공한 아시아여성기금(‘국민기금’이라고도 불림)을 수령한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신자로 낙인찍기도 했었다. ‘기금 수령=불명예’라는 등식은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김 박사는 여성의 성 문제를 ‘명예’와 연결 짓고 ‘민족’을 위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식 정대협의 강요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열녀 강요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에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수절을 강요했지만 지금 정대협은 ‘민족’을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의 민간위로금 거부’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무력한 식민지의 여성으로서 폭력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한국사회는 그들을 가족, 혹은 조국의 명예를 더럽히는 수치스런 존재로 취급해왔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희생을 통해 명예를 얻고자 했던 것은 높은 ‘가문’이었고, 고귀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남성적 이해를 대변하면서 여성의 희생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다. 수절한 여성에게 열녀문을 하사하고, 조선여성의 정절사상을 자랑거리로 여기면서 만족과 영예를 얻은 것은 가문과 조선의 남성이었지, 당사자 여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정절사상을 공고히 함으로써 그 자신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의 성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데 이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정대협, “민족적 대립구도 위해 ‘일본인=매춘’, ‘조선인=성노예’ 차별화…근거 희박”
김정란 박사는 정대협이 위안부를 여성 문제에서 민족 문제로 둔갑시키려는 과정에서 여러 자가당착적 무리수를 뒀다는 점을 논문 곳곳에서 지적한다.
김 박사는 먼저 태평양전쟁 당시 종군위안부 문제가 아시아 여성 전체의 성문제가 아닌, 정대협 측이 주장하는 식 우리 민족만의 피해라고 주장할 근거도 희박할 뿐 아니라, 해당 문제를 민족 문제로 규정하게 되면서‘피해자 여성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은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을 언급한다.
정대협 측에서는 공창제와 종군위안부는 경우가 다르며,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의 처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공창제는 ‘매매춘’이나 종군위안부는 사실상 ‘성노예’이며, 만약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가 ‘매매춘’에 가깝다면,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는 ‘민족말살적 강간’(양현아)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위안소를 찾아오는 남성과의 관계이다. 일본 여성들에게 일본군인은 자기나라 남성들이었다. ...여기에서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놓인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조선인 ‘위안부’에게 일본은 우리의 적으로 전쟁에 패해야 우리에게는 해방이 오는 것이었다. 조선인‘위안부’들은 적국의 남성, 바로 적에게 계속 성폭행을 당한 것이었다(윤정옥, 1997).”
하지만 이와 같은 식의 정대협 측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최근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종군위안부는 단순히 ‘군 부대로 옮겨 온 ’공창(公娼)’’이라는 점을 설득력있게 전개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종군위안부들이 여러 법적권리를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그들을 본질적 의미에서의 ‘성노예’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는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정란 박사도 위안소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 박사는“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취급을 받던 대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면서 “둘은 민족 정체성을 달리하지만, 계급적 배경과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증언집에는 (조선인 위안부가)일본인과 함께 같은 위안소에 있었거나 근처의 일본인 위안소에 머물던 일본인 여성과 서로 알고 지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민족’의 경계가 주목되는 차원에서 각 민족의 차이는 조선 여성의 피해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정렬되어 있다. 일본 여성에게는 모성이 강조되는 한편 조선 여성에게는 모성말살이 강요되었다는 주장이 조선 여성의 피해를 부각시키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정진성, 1998:79). 그러나 일본인 여성들 중에는 전장에 동원된 ‘위안부’들이 있으며, 조선인 여성 또한 모성적 역할, 노동력 제공자, 성 제공자로서 놓여있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강요받았다.”
물론 민족적 정체성과 상관없이 여성들은 모두 피해자였다는 것이 김정란 박사의 주장의 요지이지만, 이는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인 위안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김 박사는 정대협이 상정한 ‘민족적 대립구도’와 달리, 실제 조선인 위안부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일본을 증오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피해자의 성적 혹은 민족적 피해의 내용은 매우 중층적이며, 그들의 민족경험이라는 것도 하나의 잣대로 표현되기 어렵다.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가진 많은 피해자들이 있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기도한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일본인과 결혼을 꿈꾸거나 일본인의 아이를 낳아 살면서 이들의 민족 감정은 ‘적국=일본’ 이라는 단선적인 것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해방=기쁨’, ‘일본인=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돈도 못벌고, 몸을 버린 채” 맞게 된 조국의 해방은 크나 큰 절망과 좌절로 경험되었다. 지식인의 ‘민족’ 인식과 ‘위안부’ 피해자의 ‘민족’ 경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일부 종군위안부들이 일본군과 외견상 ‘동지적 관계’까지 맺게 되는 태평양전쟁의 비극상을 고발한 책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뿌리와이파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김정란 박사의 논문에서는 종군위안부들이 분명 성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았었다는 사실도 확인시켜주고 있다.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실제로 돈이나 대가를 받았는지 여부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되어왔다. 위안소는 형태에 따라 군이 직영하는 군직영 위안소와 업자를 이용한 군전용 위안소로 구분된다. 위안소의 대다수는 후자의 형태로 운영되었고, 여기서 상당수의 군인들은 위안소 이용요금을 냈던 것으로 보인다.”
김 박사의 논문에 실린 이용요금 통계에 관한 주석에 따르면, 돈을 받지 못했다는 증언은 극히 일부(1.6%, 3명)에 불과하다. 반면, 군인들이 군표나 돈을 냈다(47.9%, 92명), 파악불가(32.8%, 63명), 모르겠다(8.9%, 17명), 기타(8.9%, 17명)으로 나타난다.
모호한 응답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 김 박사는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할 때 일부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주인에게서 혹은 군인에게서 얼마간의 대가를 받은 것을 밝힐 수 없었다. 대가가 있었다면,매매춘으로 즉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으로 용인하는 태도를 이 사회가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위안부 ‘강제연행’엔 조선인에 의한 모집까지 포함… 일반 인식과 괴리
김정란 박사는 논문을 통해 위안부 강제연행(강제동원)을 주장하는 정대협의 주장은 근거가 취약하다는 점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김 박사는 “강제연행의 근거로 정대협은 요시다 세이지(‘나의전쟁범죄’, 1983)의 양심선언을 근거로 위안부 동원이 징용의 업무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후 드러났듯이 위안부 동원은 관헌에 의해 폭력적으로 끌려간 협의의 강제연행만은 아니었다”고 지적하면서 “근로정신대 동원이 군 위안부 동원으로 잘못 인식되기도 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즉, 강제연행의 근거가 취약함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정대협이 사용하는 강제연행 개념과 일반인이 받아들이는 의미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김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정대협이 얘기하는 강제연행은 곧 ‘광의의 강제연행’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군이 배후에 있는 취업알선, 사기 등이 모두 포함된다. 한국인이 한국인 위안부를 알선하고 모집한 사례도 ‘강제연행’이라는 것이 정대협과 같은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의 시각인 셈이다. 언론은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에 담긴 정대협과 일반대중의 인식차를 정확히 보도하지 않고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정대협이 주장하는 ‘광의의 강제연행’에는 한국인 모집업자에 의한 ‘모집’, 그러니까 계약관계에 따른 사례가 첫 번째로 가장 많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 영화 ‘귀향’,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등이 그렸던 바 있는 일본군 헌병에 의한 직접적 강제연행의 이미지와는 정면배치되는 사실관계가 아닐 수 없다.
실제 김 박사는 논문의 각주를 통해서 “광의의 강제동원 사례에서 동원주체는 한국인 모집업자(33.3%), 군인/군속(23.4%), 순사(23.4), 일본인 모집업자(18.2%), 이장/구장(8.9%), 교사(2.1%), 가족 친지(1%) 순으로 나타난다. 동원방식은 취업사기(51.0%), 유괴 및 납치(33.9%), 군관의 압력(25.0%), 인신매매(3.1%)순”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대협, 왜 도리어 위안부 할머니들을 억압하는가?
김 박사의 논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정대협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주의 노선이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을 억압하는 모순이다.
김정란 박사는 “위안부 문제는 운동의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수난을 상징하는 단적인 예로 간주되어왔다. 그러한 경향은 국민기금이라는 일본의 강력한 묘수에 대한 맞대응의 과정에서 한층 고조되었다”고 지적한다.
“국민기금의 수령여부는 ‘우리 민족이’ 바른 역사를 기록하고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갈림길로 의미화 되고 있다. 여기서 주어는 ‘우리 민족’이다. ‘민족’과 ‘역사’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기금수령의 당사자로서 생존자의 존재는 비가시화 될 수밖에 없다. 생존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기금을 수령할 것이냐 여부가 아니라 전쟁범죄의 희생자라는 숭고한 위치를 택할 것이냐, 아니면 불쌍한 노인으로 전락할 것이냐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택이 될 수 없었다. 정답이 이미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대협의 위안부 할머니들 개인에 대한 억압은 ‘화냥년’이라는 주홍글씨로 극대화된다. 1997년 1월 7명의 할머니들은 일본이 조성한 국민기금을 수령한다. 김 박사는 “정대협은 국민기금을 ‘민간위로금’ 혹은 ‘동정금’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가난한 아시아 피해자들의 입막음을 위한 술수”이자, “범죄은폐와 법적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술수”로 규정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제는 관련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이 다양했었다는 점이다.
“한편의 피해자들은 정대협과 인식을 같이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혔고 한편의 피해자들은 국민기금 측에 편지를 보내서 수령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분명한 의사를 밝히지 않은 침묵하는 다수가 있었다.거부의사를 분명히 한 피해자들은 운동의 전면에 있었던 분들로 이들의 입장은 활동의 과정에서 고양된 정치적 의식을 드러낸다.”
김 박사는 논문에서 한 정대협 측 인사가 기금을 수령하기로 한 위안부 할머니에게 ‘화냥년’이라고 폭언을 했다는 증언까지 소개한다.
“그러니까 지금 정대협에서는 (일본에) 1억 5천을 요구한다, 천년 세월이란 말이여 이게. 나이 많은 할머니들은 1억 5천이 어디가 있느냐.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 아무 데고 마저 주는 돈 받아서 쓰고 죽겠다. 다수가 이거야. 그냥 딴 뜻은 없는 것 같아. 할머니들 요구가 무리도 아니고. 거기서 인제 또 정대협에서 (국민기금을) 주지 말라고 일본에 소문을 퍼뜨려 놨더라고. 그래서 기금을 주지 말라는 얘기지··· (그러니) 보상을 주나? 안 주지. 아무 거고 몇 천만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먹게 내버려두지. 죽는 놈 죽고 사는 놈 살고 오래 살면 이제 보상 타는 놈 타고 이렇게 해결져야지. 하는 일이 답답해요.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석복순, 증언집 5권).”
김정란 박사는 ‘화냥년’이라는 폭언까지 나온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지 않았다.
“오랜 세월 비난과 박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화냥년'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국민기금에 대한 반대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논리가 사용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불충분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돈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뒤이어 표현된 '화냥년'이라는 용어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성적인 함축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 정대협의 패러다임 전환 없다면 ‘난망’
위안부 할머니들 숫자는 1997년 당시 160여명에서 지난해 위안부 합의 직전 46명이었고, 현재는 40명으로 줄었다. 급격히 줄어드는 생존자의 수와 대폭 늘어난 기금의 규모에도 정대협의 ‘기금 수령=불명예’라는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정대협은 얼마전 ‘일본의 공식사과와 법적배상을 요구하는 전세계 1억명 서명운동’에까지 돌입했다. 세계 곳곳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는 일까지 추진하면서,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를 ‘영원한’ 한일관계의 걸림돌로 끌고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all or nothing 이 정대협의 노선인 것이다. 김정란 박사는 마치 이러한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과연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의 유린된 인권의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의 파괴된 자존심의 문제인가. ‘위로금 수령=불명예’ 라는 공식 속에서 생존자들은 기금거부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누가 ‘그래도 나는 기금을 수령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로금을 받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는 앞서의 논리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아울러 김 박사는 정대협이 ‘운동을 위한 운동’,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니라 ‘조직을 위한 운동’, ‘활동가들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거기에는 정대협의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이 국민기금을 수령할 경우, 할머니들은 흩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위안부’ 운동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위기감이 뭐였냐면, 정대협의 위기감이, 국민기금 받고 그러면 할머니들 뿔뿔이 흩어지고 운동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된다는 거죠. (왜 흩어지게 되죠?) 지금까지의 결속력은 일본에 대한 사죄, 배상 투쟁이거든요(D와의 인터뷰)
‘위안부’ 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피해자의 존재는 결정적이다. ‘위안부’ 피해의 당사자가 살아서 눈앞에 있다는 것은 ‘위안부’ 이슈가 지금 현재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자의 대중에 대한 호소력과 설득력은 그 어떤 것보다 월등하였다. 즉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는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대협은 이들의 존재가 ‘위안부’ 운동의 성공적 전개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금의 수령은 그 자체로써 뿐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여러 파급효과에 대한 고려 속에서 격렬한 반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김 박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경제적인 문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정대협 측 지식인 활동가들에게 ‘거대사고증’ 혐의를 제기하며 여기에 혹시 ‘계급’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피해자들의 경제적 필요는 활동가들에게 우선적인 가치가 아니었다. 국민기금은 활동가들에게 단순한 '돈 문제'로 이해되었으며, 중대한 역사적 시점임을 감안할 때 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그러나 피해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정적 가치가 부여되었고 수령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피해자들은 기금의 수령을 원했고 실제로 이를 수령하였다. 활동가와 일부 피해자들 간의 이러한 대응의 차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놓여있다.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지식인 활동가들은 오랜 세월 빈곤한 삶을 영위해온 생존자들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김정란 박사는 결론적으로 정대협식 위안부 운동을 비판적으로 극복해야하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피해자 중심주의’, 위안부 당사자들 개개인에 대한 이해와 그들이 겪었던 상황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위안부’ 당사자들이 겪었던 개인적인 피해의 경험과 아울러 그들을 그러한 상황으로 몰고 갔던 한국과 일본의 상황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한국의 어떠한 정치적,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았고, 왜 몇 년씩 그곳에 있으면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며, 또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조차 심정적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고 변화시키지 않는 한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들이 경험한 억압의 내외적 원인과 이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도전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지난 10년 넘게 싸워온 투쟁의 노력과 성과는 현실화되지 못할 수 있다.”
김 박사는 민족주의에 의해 억압되고 있는 여성주의 문제를 얘기하며, 이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촉구하며 논문을 끝맺는다.
“이 연구는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의 문제인식에 대한 것이지만 이 연구의 결과는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서 제기하고 다수의 여성단체에 의해 주도된 ‘위안부’ 운동조차도 민족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시급성을 드러낸다. ... 한국 뿐 아니라 많은 전식민지 국가들에서 민족주의는 민족 내부의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인식과 도전을 가로막는데 이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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