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3일 토요일

‘제국의 위안부’와 목소리의 초상

제목 : ‘제국의 위안부’와 목소리의 초상

부제목 : 순결한 처녀만이 민족의 처녀가 될 수 있다는 식, 정형화된 위안부 담론의 폭력성



※ 본 원고는 배홍진 작가님이 9월 3일자로 오마이뉴스에 기고하셨던 원고이지만 결국 정식 기사로는 채택되지 못했습니다이에 미디어워치가 '오마이뉴스'를 대신해 배작가님의 글을 정식기사로서 공개합니다. ‘미디어워치는 앞으로 우리 사회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반일강박관념(反日强迫觀念)’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해나갈 예정입니다.


위안부는 목소리의 초상(肖像)이다. 제국주의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침묵해야 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역사적 초상화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위안부에 관한 이미지는, 그렇게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증언)를 토대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형성은 한편으로 배제를 토대로 한다. 모든 초상화는 필연적으로 얼굴에서 초상화가 되지 못한 표정들을 소거한다. 

위안부 여성은 내내 존재해 왔지만, 위안부 ‘피해자’가 존재할 수 있게 되기까지 무려 40여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은, 우리가 위안부를 피해자로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불결한 여자였고, 민족의 숭고한 희생자가 아니라 민족적 수치였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를 피해자로 상상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민족과 역사의 숭고한 피해자로 호명되었고, 그 목소리들은 초상화로 이미지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목소리의 초상은, 초상이 되지 못한 다른 위안부들의 목소리를 차근차근 지워나갔다. 40여년이 걸려 위안부는 ‘위안부 피해자’가 되었으나,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위안부들은 피해자가 되지 못했고,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순결을 강조하지 않는 목소리는, 피해자로 상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 피해자의 순결한 초상화 주변에서, 머뭇거리다 사라져버린, 또 다른 위안부들의 목소리도 피해자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시도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다른 목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이려 했던 박유하 교수의 시도는 결국 권력으로부터의 탄압이라는 수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위안부 피해자들의 다른 목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이려 했던 박유하 교수의 시도는 결국 권력으로부터의 탄압이라는 수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제국의 위안부’가 자료(증언들)를 편취했고, 부분에 지나지 않는 위안부의 목소리를 일반화했다고 비판자들은 말한다. 그들은 위안부의 목소리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들어야 하는데, 박유하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얼굴은, 피해자의 목소리 이전에 존재하는 초상이어야 하는가?

그들은 박유하가 순결하지 못한 위안부를 그려내기 위해 순결한 위안부를 배제했다고 비판하지만, 순결한 위안부 상이 순결하지 못한 위안부들을 (구조적으로) 밀어내는 일에 대해선 관대하다.

자료 편취에 대해서 극악무도한 범죄라고 비난하면서도 기존의, 어떤 위안부 역사서들 역시 ‘강제로 끌려간 민족의 소녀’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증언집에서 일부의 목소리만을 편취 각색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침묵한다.

여러 판본의 증언집을 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위안부들의 목소리는 결코 순연하지도 단일하지도 않다. 거기엔 수많은 목소리들이, 피해자의 목소리로서, 개별적인 기억들로,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폭력의 고통으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위안부를 피해자로 추모하는 건, 그들이 순결한데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여하한 경우에도, 순결하지 못함이 비난의 사유는 될 수 없고, 더더욱 폭력의 이유는 될 수 없다. 애초에 순결이란 가부장의 폭력적인 동화일 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초상은, 일점 불순물도 없는, 무슨 피해의 순수 농축액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순수 농축액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불순물로서 제거하는 또 다른 폭력의 결과일 뿐이다. 하여 강제로 끌려간 소녀상은, 강제로 끌려가지 않은 여성들을 배제하는, 역사라는 미명으로 작동하는 또 다른 가부장의 논리이다.

‘제국의 위안부’가 기존의 상식과는 다른 위안부의 이미지를 서술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 건, 책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민족의 성처녀로 호명되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다른 위안부들의 목소리도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까닭에 박유하는 (증언집의 목소리를 편취한 것이 아니라) 그간에 소녀상에 담기지 못한 채 떠돌아다닌 목소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그리고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 초상화의 한 켠에, 우리가 듣지 않으려 했던 또 다른 피해자의 초상화들을 세워 놓았을 뿐이다. 그 초상화들을, 모두 피해자로서 추모하건 그렇지 않건, 그건 이후 이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길 독자들의 몫이다.(검찰의 몫이 아니다.)

만약에 이런 것이 편취라면, 우리에게 단 하나의 피해자 상만을 보여주기 위해, ‘제국의 위안부’에 편취라는 낙인을 찍은 자들이야말로, 순수라는 이름으로 편취를 자행한 자들이다.

제국의 위안부, 여기 또 다른 위안부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들이 도무지 피해자로 상상되기 힘들다 할지라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피해자만 피해자인 건 아니다. 일본과 투쟁하는 데 효과적인 목소리만 위안부의 목소리인 건 아니다. 그리고 위안부 소녀상만, 위안부의 얼굴인 건 아니다.

아주 먼 곳에서, 우리가 듣지 못한 또 다른 목소리들이, 감감히 들려온다.

위안부는 목소리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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