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9일 금요일

현대의학은 얼마나 근거중심의학적인가?

제목 : 현대의학은 얼마나 근거중심의학적인가?

부제목 : 과학적 근거와 과학적 개연성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현대의학



예일대학교 임상 신경과 교수 스티븐 노벨라의 블로그 Neurologica
▲ 예일대학교 임상 신경과 교수 스티븐 노벨라의 블로그 Neurologica


 본 콘텐츠는 '과학중심의학연구원(http://www.i-sbm.org)'이 제공하는 공익콘텐츠입니다. 이 글은 예일대학교의 신경과 임상교수인 스티븐 노벨라의 "How much modern medicine is evidence-based"를 번역한 글입니다.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은 원래 현대의학에 대한 자기 비판과 진보적 발전 성격으로 도입된 개념인데, 한편으로는 현대의학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도구로서도 활용되는 문제가 있습니다(심지어 주류 현대의학 내부에서마저도). 여기에 대한 교정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소개합니다. 더불어 이 글은 근래 한의사들의 현대의료기기 사용권 요구와 맞물려서도 나름 맥락이 있는 글임을 밝혀둡니다. 의료의 기준이 높아져도 모자랄판에 누구나 의사 행세를 할 수 있게 하는 일은 결국 의료의 기준을 떨어뜨리는 일을 하게될 공산이 높습니다. 황의원 과학중심의학연구원 원장과 김주년 주간 '미래한국' 기자가 같이 번역했습니다.



지난주 내가 쓴 동종요법(homeopathy) 비판글에 대해서 내 블로그 독자인 제이슨(Jason)은 다음의 댓글을 남겼다.
“물론 나는 사이비의료인 동종요법과 같은 것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뤄야할 보다 더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 있다.

의사들에 의해 처방된(그리고 약국에서 판매되는) 약품들 중에서 상당수가 미국식약처(FDA)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최신 뉴스에 뒤이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까? 바로 서양의학 치료법 중 50% 미만만이 유효한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일부 전문가들은 그 수치가 15% 정도라고 예측한다는 것을 말이다.

출처-'워싱턴 먼슬리'
http://www.washingtonmonthly.com/features/2007/0710.brownlee.html

만약 15% 라는 수치가 사실이라면, 차라리 대체의학 분야가 현대의학에 비해 과학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스티븐 노벨라, 당신이 동종요법에 버금갈 정도로 과학적 유효성이 미미한 서양의학 치료법들을 알려 준다면 정말 감사하겠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경이로운 일이 될 것이다.“
제이슨의 댓글에 감사를 표하면서, 나는 먼저 현대의학에서 근거중심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50% 미만 또는 15%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부터 하고 싶다. 저기서 거론된 수치는 과학적 의학을 비판하는 이들과 “대체의학” 지지자들의 선동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념적 유용성이 있는 여러 신화(myth)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잘못된 수치들은 지금 우리네 문화에 단단히 새겨져 있으며, 아마도 우리는 그런 허위를 앞으로도 계속 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소문이나 신화와 마찬가지로,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인용하는 “출처(source)”라는 것은 늘상 2차 출처(secondary source)이기 마련이다. 즉, 누군가 잘못된 루머를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건 “친구의 친구에게서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물론 그런 소식을 전했던 최초의 친구를 찾기는 어렵다. 현대의학을 비난하고자 이들은 잘못된 수치를 검증조차 하지 않은 채 그냥 반복할 뿐이다. 또한 나는 다음과 같은 지적도 하고 싶다. 위에서 인용된 '워싱턴먼슬리(Washington Monthly)'의 기사는 대단히 정치적인 내용의 기사이다. 약간의 진실도 없지는 않으나, 극심하게 왜곡되어있으며 의료계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편향된 시각이 담겨있다.

다행히 밥 임리(Bob Imrie, 그는 과학적 회의주의 수의사이자 위대한 인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최근에 사망했다.)는 저 잘못된 수치의 원 출처를 찾아내는 일을 해냈다. 15% 라는 수치는 잉글랜드 북부의 1차 진료소(primary practice office)에서 1961년에 실시된 소규모 설문조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얼추 맞는 이야기다. 거의 반세기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저 설문조사는 1차 진료가 얼마나 근거중심의학적인지에 대해 분석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대신에 보험환급(insurance reimbursement)의 관점에서 치료법들이 “명확한지(specific)" 여부를 살펴보고 있었을 뿐이다. 즉, 15%라는 수치는 잘못 제시된 것이며, 시기적으로도 반세기 전의 것이다. ( R. Imrie & D.W. Ramey, The evidence for evidence-based medicine, the Scientific Review of Alternative Medicine, Vol.5 No.2 )
 

R. Imrie & D.W. Ramey, The evidence for evidence-based medicine, the Scientific Review of Alternative Medicine, Vol.5 No.2
▲ R. Imrie & D.W. Ramey, The evidence for evidence-based medicine, the Scientific Review of Alternative Medicine, Vol.5 No.2


그렇다면 관련 정확한 수치는 무엇일까? 이 문제는 약간의 주관성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근거중심의학적’이라는 개념이 흑백의 양자 택일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거에는 수준(degree)이 있다. 또한, 현대의학은 손에 잡히는 과실들을 모두 채집한 상태다. 이 말은 복잡하지 않은 의료적 상황에서는 근거중심의학적이니 뭐니 애초 따질 필요도 없는 확실한 치료법들이 이미 개발됐다는 뜻이다. 여기서 밥 임리는 수혈(blood transfusion)을 사례로 든다. 만약 누군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출혈이 심하다면, 우리는 당연히 더이상의 출혈을 막고 또 혈압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혈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결정으로, 이를 굳이 근거중심의학적으로 확실히 입증하기 위하여 특정 환자들이 계속 피를 흘리게 하거나 특정 환자들에게는 수혈을 보류하는 대조군을 두는 임상시험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매우 비윤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인 사안은 제쳐두고라도, 의사들이 하는 일의 ‘근거중심성(evidence-basis)’을 검증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는 기관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 중에서도 학문적으로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을 확립하고자하는 그룹들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목적은 특정 치료법들의 근거에 대해서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을 시도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대해선 여러 의학분야에 따라서 각각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또 어떤 전문가는 다른 이들보다 플라시보 대조군 임상시험에 더 참여하기도 한다. 하여간 임리는 관련 근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러므로, 현대의학 분야에서 출판된 결과들은 평균 37.02%의 치료법들이 무작위대조군임상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의 뒷받침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간값 = 38%) 그것들은 평균 76%의 치료법들이 어떤 형태의 유력한 근거의 뒷받침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간값 = 78%)” ( R. Imrie & D.W. Ramey, The evidence for evidence-based medicine, the Scientific Review of Alternative Medicine, Vol.5 No.2 )
평균 76%! 이 수치는 앞서 제시된 “15% 정도”와는 분명 완전히 다른 세계의 수치다. 또한, 여기에다 우리는 76% 이외의 다른 24~25% 도 유력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과학적 개연성(plausiblity)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치료의 맥락(context)도 역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떤 질환을 가진 환자에 대해 근거중심의 치료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면(또는 존재하는 치료법이 실패했거나 사용될 수 없다면) 철저하게 검증되지는 않았더래도 과학적 개연성은 있는 치료법들은 시도할만 하다. 

내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내가 내리는 임상적 결정 중 거의 100% 가 이미 확립된 지식에서 뻗어나간 합리적인 연장(rational extension)과 과학적 개연성(plausible), 그리고 존재하는 최고의 근거를 조합한 것에 기반하고 있다. 환자를 보는데 있어 어떤 근거도 없다거나, 단순 사례에만 근거를 둔 치료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적어도 현대의학쪽의 치료법은 생물학적으로 개연성이 있는 작용 기구(mechanism of action)가 있으며 해롭지 않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특별하게 실험적인 치료법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상당한 규제를 받으며 강제적인 윤리 가이드라인을 따른다.

“미국식약처의 승인 없이 처방된(off-label)” 약품들과 관련해서도 역시 독자인 제이슨의 지적은 오해다. 미국식약처는 특정 진료에 대해 안전과 효과에 대한 높은 수준의 근거를 요구한다. 그리고 특정 진료에 대해서만 해당 약품을 판매하도록 제약회사에게 압력을 가한다. 하지만 실제 의료계의 현실은 다르다. 질환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고 진단들은 정돈된 독립체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식약처의 행정은 마치 질환이 고립된 결과이고 진단도 잘 정돈된 독립체인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이것은 편의성의 허구(fiction of convenience)이며, 실제로는 관계자들도 모두 이를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식약처는 심발타(Cymbalta)라는 약품을 고통스러운 ‘당뇨병성 말초신경병증(diabetic neuropathy)’에 처방하도록 승인했다. 당뇨병성 말초신경병증은 구체적인 질환 진단이다. 그러나 당뇨병은 다양한 종류의 신경 손상 및 다른 종류의 신경병적 통증(neuropathic pain)도 역시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신경병적 통증은 많은 다른 요소들에 의해서도 초래될 수 있다. 당뇨에 의해 생기는 신경병적 통증은 ‘삼차 신경병증(trigeminal neuropathy)’ 또는 ‘대상포진후신경통(postherpetic neuralgia)’에 의해 생기는 신경병적 통증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똑같을 수도 있다. 심발타가 이러한 다른 형태들의 신경병적 통증에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당뇨병성 말초신경병증이 아닌 다른 신경병증적 통증에 심발타를 사용하는 것은 미국식약처의 승인 없이 약품을 처방하는게 되어버린다.

핵심은 이것이다. 미국식약처의 승인을 넘어서 어떤 질환에 대해 의사가 처방한 약품들을 단순히 근거가 없는 치료법들과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 의사들이 이런 약품들을 사용할만한 나름의 유력한 근거가 있다. 그런데 왜 미국식약처는 관련 승인에 있어 보수적인가. 그것은 제약회사들의 입장과 관련이 있다.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의 약품이 더 많은 질환에 사용되기위해 식약처로부터 추가 승인을 받는 데 돈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제약회사들이 돈을 그렇게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제약회사들이 돈을 쓰는 경우는 해당 승인으로 인해 그 약품이 실제로 시장점유율이 증가하리라 생각될 때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특정 질환에 대해서만 승인된 약품들을 더 깊이 연구함으로서 그것들의 실제 사용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도 확인해보려고 할 것이다.
 

근거중심의학의 근거의 수준 피라미드. 위로 올라갈수록 근거의 수준이 높다.
▲ 근거중심의학의 근거의 수준 피라미드. 위로 올라갈수록 근거의 수준이 높다.


자, 그렇다면 소위 대체의학이라는 것들은 어떤가? 제이슨의 생각과는 달리, 그것들은 아예 어떤 근거에도 기반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이 “대체(alternative)”라고 불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들은 도무지 사실일 것같지가 않은 치료효과를 주장하고 있으며, 유력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정통의학이요 현대의학이지, 대체의학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체의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오보와 혼란을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열정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는 길에 사실이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대체의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서의 진실의 일면은 (최고의 거짓말들이 항상 진실의 일면을 가지기는 한다) 우리가 현대의학을 통해서 지금보다 앞으로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 또는 의료전달체계의 문제와는 다른 문제이다. 나는 내 양심에 비춰 자기비판적(self-critical)이고 과학중심적(science-based)인 학문을 한다는 점에서 내 직업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 의학계에서는 ‘근거의 양상(state of evidence)’을 평가하고 개선한 후 그 결과들을 전체 의료계에 확산시키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많은 연구자들도 많이 있다.

다만 과학중심의학(science-based medicine)은 어렵다. 근거는 넘쳐나는데 그것들을 모두 좇아서 일일이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나는 우리가 덜 주먹구구식이고, 보다 더 체계적인 의학 교육을 계속함으로써 결국에는 큰 혜택을 볼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엔 치료사들에게 확립된 근거중심의 기준을 교육시키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더 잘해낼 수 있다. 학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나로서는 우리의 시스템이 실제로 잘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물론 근거중심의 기준들이 현장의 치료사들에게 더 빠르고 체계적으로 낙수효과(trickle down)를 낼 필요는 있다.

‘제대로된 수준(general level)’의 근거가 우리 정통의학 내에 있는 만큼, ‘제대로된 합의(general consensus)’는 우리가 이 학문을 계속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중심의학의 개선과 치료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검토 역시 마찬가지로 계속돼야 한다. 반면에, 대체의학 지지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이중적인 기준을 만들기만을 희망한다. 믿을만한 근거 및 과학적 개연성에 대한 더욱 낮고 낮은 기준 말이다. 대체의학의 치료사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가리기 위해, 정통의학 역시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는 식의 소설을 써대면서 항상 우리 의료의 기준을 낮추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의학의 시급하고 중대한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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