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컨디셔닝, 플라시보, 노시보

제목 : 컨디셔닝, 플라시보, 노시보

부제목 :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8)



문화비평가 서범석 시그니처
▲ 문화비평가 서범석 시그니처


 본 콘텐츠는 '과학중심의학연구원(http://www.i-sbm.org)'이 제공하는 공익콘텐츠입니다. 이번 글은 네이버 블로그 등을 통해 한의학을 비판해온 문화비평가이자 과의연 특보인 서범석님의 시리즈 한의학 비판 글인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입니다. 서범석님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필치에 더해 한의학 문제를 바라보는 보다 풍부한 관점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귀한 원고를 투고해주신 서범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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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까다로운 문제는 이런 것이다. 경락이나 경혈은 고대 중국인의 머리 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전혀, 아무러한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앞으로 이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이나, 그 전에 몇 가지 약학 용어들을 습득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컨디셔닝(conditioning)’이다. ‘컨디셔닝’이란 시술자가 피시술자의 상황이나 조건을 조절하여 정신감염력을 높이려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쉽게 말해 피시술자의 머리에 신념을 심어주는 것이다. 뜸사랑 체험기에서 ‘뜸뜰 자리를 잡던 남성 요법사’가 본인에게 “믿고 열심히 하면 효과가 있다, 6개월이면 피가 변한다”라고 말한 것이 ‘컨디셔닝’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보통 피시술자는 시술자의 말 혹은 주어진 약에 반응하여 몸과 마음에 일련의 변화를 겪게 되는 데, 특히 긍정∙순응하는 쪽으로 반응할 경우, ‘컨디션드(conditioned)’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필자가 말하는 정신감염 행위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런데, 필자는 침∙뜸에 ‘정신면역자’이므로 남성 요법사의 말에 ‘컨디션드(conditioned)’ 되었을까, 안 되었을까? 안 되었다.

둘째,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가짜 약 효과, 僞藥效果)'다. 밀가루나 식염수 등 약리적으로 아무 효과도 없는 가짜 약을 천식 특효약인 것처럼 환자에게 ‘컨디셔닝’하고 투약하였는데, 해당 환자가 ‘컨디션드’되어 실제로 증세의 호전을 보였다면, 이 때 ‘플라시보 효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과학적으로도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보통 이 정도만 배우고 말기 때문에 우리는 암암리에 다음과 같은 착각에 빠진다. 즉, 플라시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실제로 어떤 ‘물질(가짜 약)’을 환자에게 투입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일체의 투약 행위 없이 ‘당신은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는 ‘언어적 컨디셔닝’을 하는 것만으로도 플라시보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컨디셔닝’을 시도하는 자가 환자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권위자로 인식되면 인식될수록 그 효과는 강력해진다.

경혈 자리 따위는 만천하에 공개된 정보이다. 당연히 골방에서도 혼자 뜰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로 알려진 김남수 옹에게 직접 시술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결과를 얻는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 권세가 있는 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김남수 옹에게 직접 시술을 받고자 한다. 제자들의 시술은 신통찮아 한다. 웃기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같은 경혈 자리이며 동일 증세에 대한 처치가 크게 달라질리도 없는데 말이다. 역설적인 것은 환자가 그를 만나려고 용을 쓰면 쓸수록 효과는 더욱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김남수 옹에게 시술을 받으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자의 굳센 의지로 인해 환자 자신이 그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셀프 컨디션드(self-conditioned)’되버린 것이다. 일종의 자기최면 상태이므로, 김남수 옹이 따로 ‘컨디셔닝’을 시도할 필요가 없다. 이런 환자에게는 한 방에서 그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 그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컨디셔닝’으로 작용한다.

이런 현상은 대체 왜 일어날까? 마르티나 아맨지오(Martina Amanzio) 등은 “플라시보 효과에 대한 몸의 반응이 부분적으로는 몸 속에 있는 천연진통물질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 몸 속에 있다는 천연진통물질은 무엇인가. 바로 엔도르핀, 코티솔, 아드레날린, 오피오이드 펩티드 같은 신경전달물질들을 가리킨다.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컨디셔닝’만으로도 이러한 물질의 분비가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침∙뜸과 관련해서 전 세계적으로 통증이 감소되었다는 보고가 가장 많은 것은 시술 행위와 시술자의 정신 감염이 이러한 신경전달물질 분비를 실질적으로 촉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만약 그 통증이 만성적인 것이었다면 시술을 중단하였을 때 통증은 재개된다. ‘허리가 아파 한의원을 1년 다녔는데, 다닐 때만 효과가 있고 도로 그대로더라’는 푸념은 이를 방증한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이런 천연진통물질은 침을 꽂는 행위 이외에도 아주 매운 청량 고추를 씹을 때나, 참선을 하거나, 마라톤을 뛸 때도 분비된다. 달리는 행위가 뇌 속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켜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용어까지 있을 정도이다. 또, 하다못해 뒷골목에서 괴한에게 칼‘침’을 맞더라도 분비된다. 통증은 생명체에게 위급 상황을 알리는 경고음이기도 하지만 일정 한도를 넘어가면 생명체가 의식을 잃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물질들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는 것이다.
 

Runners High. 여기서 high란 향정신성 약물에 도취된 듯한 상태를 의미한다.
▲ Runners High. 여기서 high란 향정신성 약물에 도취된 듯한 상태를 의미한다.


셋째, ‘노시보(Nocebo) 효과’다. ‘노시보 효과’란 가짜 약을 투여한 사실을 환자가 알아차렸을 경우, 즉시 플라시보 효과가 무력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플라시보 효과의 반대말 쯤 된다. 만약 침∙뜸으로 대단한 효과를 보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오히려 필자에게 정신감염되었다면 그간 보았던 효과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또 왜 일어나는 걸까. 피시술자가 그 진정한 효과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이 갖고 있는 마음이나 태도가 실제로 그 개인의 몸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가 단순히 ‘치유’라고 불렀던 것이 사실은 굉장히 복잡한 과정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치료 과정’에 의사나 환자의 몸 및 마음 반응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을 ‘몸’이니 ‘마음’이니 나누어 설명하는 데서부터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몸∙육체∙물질’과 구별하여, ‘마음∙정신∙의식’이라고 따로 떼어내 부르는 것도 실상은 신경전달 물질, 신경전달 세포와 같은 뇌 속 ‘물질’간의 전기적 교류의 결과에 불과하므로 몸이니 마음이니, 육체니 정신이니, 물질이니 의식이니 하는 대립된 구별은 무의미하며 실은 다 같은 ‘몸∙육체∙물질'이 빚어내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정신∙의식’의 작용은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이것이 나타나는 현상이 다른 현상들과는 매우 구별되고 또 왜 그러한 구별이 발생하는지 인지할 틀도 없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별도인 것처럼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폐는 ‘호흡작용’을 하는 몸의 기관이고, 심장은 피를 순환시키는 몸의 기관이며, 뇌는 ‘마음∙정신∙의식작용’을 하는 몸의 기관일 뿐이다. 다 같은 몸의 기관이다. 다만, 그 드러나는 양상,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서로 다를 뿐이다.

어떻게 다를까. 인간이 이룩한 문명에 그 해답이 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뇌’가 만들어내는 현상의 결과물들인 것이다. 대장(大腸)이라는 몸 기관은 샤프 펜슬을 만들지 않는다. 심장(心臟)이라는 몸 기관은 프랭클린 플래너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신장(腎臟)이라는 몸 기관은 언어를 인식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간(肝)이라는 몸 기관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폐(肺)라는 몸 기관은 영혼이니 천국이니 하는 개념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모두 두뇌라는 몸 기관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다.

전통적으로 언어는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는 대표적 표상으로 여겨져 왔지만,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인간의 ‘몸 행위’에 불과하다. 시술자가 ‘마사지’라는 몸 행위를 통해서 피시술자의 혈액순환개선이라는 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언어’라는 몸 행위를 통해서도 피시술자의 다양한 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가령,정체모를 괴한이 전화를 걸어와 (실제로는 아니지만) 자녀를 납치하였노라고 ‘컨디셔닝’하는 것만으로도 아이 부모의 심장 박동을 가파르게 상승시킬 수 있다. 유괴범이 구사한 언어라는 몸 행위가 부모의 심장 박동 상승이라는 몸의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연재물에서 ‘몸∙육체∙물질’과 ‘마음∙정신∙의식’, 이 둘을 통합한 용어를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전통적인 구별법을 따르되, ‘마음∙정신∙의식’이라는 것도 실은 ‘몸∙육체∙물질’에서 파생된, 특이적 현상일 뿐이라는 점만 인식하고 넘어가자.

이러한 플라시보 효과는 꼭 고대중국의학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한국의 ‘현대과학기반의학(MSBM)’ 병원에 가면 항생제를 준다. 선진국에선 안 준다. 한국의 ‘현대과학기반의학(MSBM)’ 종사자들이 플라시보 효과를 너무 잘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항생제 처방에 따른 제약회사들의 리베이트를 바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꼭 준다. 그런데, 이렇게 항생제를 처방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환자의 상태는 더 나아진다. 증상이 호전된 것이 항생제를 맞거나 복용했기 때문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항생제는 미생물 중 박테리아를 살상한다. 미생물 중 바이러스는 못 죽인다. 감기의 경우 리노바이러스(Rhinovirus)나 코로나바이러스(Coronavirus) 등 200여 종이 넘는 바이러스로 인해 발병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항생제는 별무소용이라는 소리다. 항원이 되는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 백신 접종하는 것이 실질적 해결책이다. 그런데, 감기 원인 바이러스의 개체수가 워낙 다양해 환자별로 백신을 만드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놔두면 자체 소멸하기 때문에 그냥 쉬는 게 약이다. 즉, 뾰족한 감기약은 없는 것이다.

감기는 바이러스로 인해 발병하므로 증상 호전이 항생제 처방과 연관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라는 환자의 안도감이 증상 개선에 일조했을 뿐이다.


다음 글 :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9) : 고대중국문명의 플라시보


저자 프로필 :

퇴몽사(退蒙士) 서범석

현재 모 고등학교에서 입학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사회기여활동으로서 과학중심의학연구원의 ‘홍보특별보좌관’도 겸임하고 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성균관-조지타운 대학교 TESOL 과정을 수료했다. 20년 넘게 중증 아토피로 고생하며 여러 대체 의학을 접했지만, 그 허상에 눈을 뜬 후 사이비 의‧과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몽매주의’를 퇴치하는 번역 및 집필 작업에 뛰어들었다.

저서: Q&A TOEIC Voca, 외국어영역 CSI(기본), 외국어영역 CSI(유형), 외국어영역 CSI(장문독해)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시리즈 / 서범석 과학중심의학연구원 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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